창동역 비둘기 - 차창룡, 나무물고기
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철근으로 지은 튼튼한
그런 집을 지어요 기적소리 요란한 기찻길 따라
새똥이 온통 질펀한 난간 사이로
해가 갔다가 오고 달이 왔다가 가고 별이 조용히 쉬었다 가고
아무리 험상궂은 사람이 다가와도 쉬 도망가지 않는 비둘기
생각해보면 비둘기는 평화로운 동물임에 틀림없기도 하다오 기차에 치어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화가 유지되는 걸 보면
평화의 상징임에 틀림없다오 나는 오늘도 피 묻은 창동역에서
니르바나에 잠겨있는 비둘기들을 보았다오
--<창동역 비둘기> 부분
시인은 창동역에서 수많은 비둘기들을, 그리고 그 눈에 보이는 대로의 비둘기들과 비둘기들의 똥 너머에서 ‘니르바나’에 잠겨있는 비둘기를 보았다.
니르바나(nirvana). 열반을 의미하는 범어이지만, 보통은 일반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피 묻은 창동역에서 니르바나에 잠겨 있는, 곧 죽은 비둘기들을 보았다. 죽은 비둘기가 눈에 보이는 달의 앞면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평화의 상징’으로서의 비둘기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두가지면 중에 한쪽 면만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비둘기’란 말에서 ‘평화의 상징’이라는 꼬리표를 떠올리거나, 혹은 창동역에서 죽은 비둘기를 보고도 그저 “죽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은 비둘기의 모습을 보고 ‘평화의 상징’ 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 둘은 분명 “비둘기” 이다. 비둘기도 생명인 이상 죽을 수밖에 없으며, 사람 사이에 섞여 살기 때문에 피를 흘리며 가련하게 죽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가능성’을 필연적으로 달고 살아간다. 동시에 사람들은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두 가지 속성은 함께 비둘기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으나, 서로 그 성격이 너무나도 다르다. 한 가지에서 다른 한 가지를 떠올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시인은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비둘기들을 보면서 ‘평화의 상징’이라는 이면을 떠올리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처참한 몰골로 죽어있는 사실을 특유의 비꼬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 하고 있다.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의 가사를 장난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섬뜩하게 바꾸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평화의 상징이라서 기차에 치여 피 흘리고 죽어도 말이 없는, 그저 그렇게 일상으로 흘러가버리고 만다는, 아주 얄궂은 동전의 양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비둘기의 세계뿐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도 이러한 “얄궂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다.
<<나무물고기>>에서 시인 차창룡은
한 가지 면 만을 보고 지나치기 쉬운 "관념"에 대해 스리슬쩍 비꼬고 있다.
물론 시에 대한 위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필자 나름의 것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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